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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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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ans339 댓글 0건 조회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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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아이파크시티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열전 6] <민족일보>는 창간 때부터 시련이 따랐다.▲ 민족일보 3조용수 선생이 정당함을 밝히는 옥중 편지 ⓒ 통일 뉴스(…) 여러 언론인이 필화사건을 겪고 군부독재에 저항해 고난을 받았지만 적어도 죽이지는 않았다. 우리 근래 언론 120여 년사 중 신문을 만들다가 발행인이 사형에 처해진 경우는 딱 한 번 바로 민족일보사건이다. 따라서 민족일보사건은 우리나라 언론사에서 최대의 필화사건이고, 그것도 사법제도가 갖춰지고 문명화됐다는 1960년대에 자행됐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부끄러운 과거라고 할 수 있다.박정희가 그를 사형시킨 이유에 대해선 여러 추론이 가능하지만 향후 정권을 잡기 위해서 언론에 본보여야 한다는 것, 장애가 되는 언론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 박정희 자신의 사상적 문제를 위한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주석 1)조용수 열사는 1930년 4월 20일 경남 진주 대곡면 단독리에서 태어났다. 친가나 외가 모두 지방에서 알아주는 명문가였다. 봉래초등학교를 나와 대륜중학교에 진학했다. 2학년 때 8.15해방을 맞았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국회 부의장을 지낸 삼촌 조경구의 비서로 근무했다.1951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에서 수학한 다음 재일거류민단 조직부 차장으로 활약, 조총련계와는 무관하고 오히려 재일교포 북송 때는 앞장서서 반대하기도 했다.4월혁명을 맞아 귀국한 조용수는 사회대중당으로 경북 청송에서 7·29총선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하고, 서상일·윤길중·고정훈·김달호·이동화·송지영·이종률·안신규 등 혁신계 및 진보적 인사들과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이 신문은 4대 사시를 내걸었다.민족일보는 민족의 진로를 가르키는 신문민족일보는 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민족일보는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민족일보는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 ▲ 남한산성에 위치한 조용수의 묘 ⓒ 최유진<민족일보>는 창간 때부터 시련이 따랐다. 진보적 논조 때문이었다. 장면 민주당 정부가 인쇄소 계약을 해지시켜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열전 6] <민족일보>는 창간 때부터 시련이 따랐다.▲ 민족일보 3조용수 선생이 정당함을 밝히는 옥중 편지 ⓒ 통일 뉴스(…) 여러 언론인이 필화사건을 겪고 군부독재에 저항해 고난을 받았지만 적어도 죽이지는 않았다. 우리 근래 언론 120여 년사 중 신문을 만들다가 발행인이 사형에 처해진 경우는 딱 한 번 바로 민족일보사건이다. 따라서 민족일보사건은 우리나라 언론사에서 최대의 필화사건이고, 그것도 사법제도가 갖춰지고 문명화됐다는 1960년대에 자행됐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부끄러운 과거라고 할 수 있다.박정희가 그를 사형시킨 이유에 대해선 여러 추론이 가능하지만 향후 정권을 잡기 위해서 언론에 본보여야 한다는 것, 장애가 되는 언론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 박정희 자신의 사상적 문제를 위한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주석 1)조용수 열사는 1930년 4월 20일 경남 진주 대곡면 단독리에서 태어났다. 친가나 외가 모두 지방에서 알아주는 명문가였다. 봉래초등학교를 나와 대륜중학교에 진학했다. 2학년 때 8.15해방을 맞았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국회 부의장을 지낸 삼촌 조경구의 비서로 근무했다.1951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에서 수학한 다음 재일거류민단 조직부 차장으로 활약, 조총련계와는 무관하고 오히려 재일교포 북송 때는 앞장서서 반대하기도 했다.4월혁명을 맞아 귀국한 조용수는 사회대중당으로 경북 청송에서 7·29총선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하고, 서상일·윤길중·고정훈·김달호·이동화·송지영·이종률·안신규 등 혁신계 및 진보적 인사들과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이 신문은 4대 사시를 내걸었다.민족일보는 민족의 진로를 가르키는 신문민족일보는 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민족일보는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민족일보는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 ▲ 남한산성에 위치한 조용수의 묘 ⓒ 최유진<민족일보>는 창간 때부터 시련이 따랐다. 진보적 논조 때문이었다. 장면 민주당 정부가 인쇄소 계약을 해지시켜 3일간 휴간한 뒤 3월 6일자로 속간할 수 있었다. 신문은 평화통일론을 주장하고, 장면 정부의 2대 악법제정과 부정선거 원흉 등의 재판 지연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신문은 1961년 천안아이파크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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